고아 위해 헌신했던 선한 일본인 다우치 지즈코[동아광장/박상준]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입력 2021. 11. 1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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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란 다우치
6·25전쟁 때 남편 행방불명 후 고아원 지켜
곤경에 처한 고아들 외면 못한 어머니 마음
기억하는 이 줄어들지만 선한 삶의 울림 여전해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다우치 지즈코는 1912년 10월 31일 일본 고치현 고치시에서 태어났다. 조선총독부 목포부청 하급관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1919년 목포로 이주했다. 목포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 중, 여학교 시절 은사의 소개로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공생원 원장이던 윤치호와 결혼했다.(독립협회 회원 윤치호와 동명이인이다.)

윤치호는 1909년 6월 13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목포의 한 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부랑아 일곱 명을 집에 데려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28년 공생원을 설립했다. 개인이 설립한 전남지역 최초의 아동복지시설이었다. 돌보는 고아가 늘어나면서 거지대장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해졌다. 일본인 자원봉사자 다우치 지즈코와의 결혼은 거지대장과 일본인 여성의 결혼으로 세간의 화제였다고 한다.

윤치호의 이력과 주변의 회고를 종합하면 그는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꽤 두터운 인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목포가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친일파로 인민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시민들의 변호로 목숨을 구했다. 그 대신 인민군은 그에게 인민위원장직을 맡겼다. 목포가 수복된 뒤에는 국군에게 체포되었지만 목포 시민들의 적극적 구명운동 덕에 석방될 수 있었다. 그 얼마 후 고아들에게 먹일 식량을 구하기 위해 광주에 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4남매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주위의 권고, 일본에 홀로 사는 어머니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지즈코는 행방불명된 남편을 기다리며 공생원을 지켰다. 양친이 있는 일반 가정에서도 하루 세 끼가 여의치 않던 시절, 고아원 운영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을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 강소천 문학전집에서 고아원을 무대로 하는 아동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전쟁 후 궁핍하던 시절, 헌신적으로 고아들을 돌보는 고아원 원장의 눈물겨운 분투를 그린 소설이었다. 다우치 여사의 장남 윤기 씨의 회고록에서 잠깐씩 비치는 그 시절의 공생원 모습을 보고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그 소설이 생각났다. 어린 마음에까지 전달되던 절망감이 다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우치 지즈코는 1968년 10월 31일 폐암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장례식은 목포 시민장으로 치러졌고, 3만 명의 시민이 운집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광복 직후에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인민군 치하에서는 친일파라는 이유로, 수복 이후에는 부역자라는 이유로 그와 그의 남편은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시민들이 나서서 그 가족을 지켰다는 것과 3만 명의 시민이 그를 기리기 위해 모였다는 것으로 볼 때, 그와 윤치호는 국적과 사상을 떠나 주변 한국인들로부터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즈코에게는 윤학자라는 한국 이름이 있다. 그는 1960년대에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언제나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을 뜨기 한 달 전 장남인 윤기에게 “우메보시가 다베타이(매실장아찌가 먹고 싶어)”라는 말을 힘겹게 뱉은 후부터는 일본말만 썼다고 한다. 그는 자녀들을 일본 호적에 올렸다. 무남독녀였던 그는 자녀들이 다우치가를 잇기 바랐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고 그 자신 한국인인 듯 살았지만, 일본을 사랑하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곤경에 처한 고아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을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았다.

어려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를 들었을 때, 나는 그저 착하게 살라는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어른이 되어서 그 우화의 청중이 유대인이었고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 증오하고 경멸하던 민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청중에게는 그래서 보편적 인류애를 상기시키는 그 우화가 더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다우치 지즈코의 얘기를 처음 듣고 나도 같은 충격을 받았다.

10월 31일은 그의 생일이자 기일이기도 하다. 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줄고 있지만, 선한 일본인 다우치 지즈코의 얘기를 듣게 된 사람들에게 그의 삶은 여전히 충격을 준다. 그의 고향인 고치시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기념비가 있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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