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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3) 죽을 때까지 고아 돌본 일본인, 진심은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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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생복지재단 작성일19-04-15 15:08 조회1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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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고아 돌본 일본인, 진심은 통했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 목포 공생원 지킨 윤치호·윤학자 부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다.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다. '고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다우치 치즈코, 한국 이름 윤학자 여사에 대한 얘기다. 그 무대가 공생원이다. 전라남도 목포 유달산 자락, 대반동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다.

공생원은 전라남도의 첫 번째 고아원이다. 한국사람 윤치호와 일본사람 치즈코 부부의 위대한 여정이 배어 있는 사회복지시설이다. 공생원을 설립한 이는 윤치호다. 그는 가난 때문에 정규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14살 때 소년가장이 됐다. 미국인 선교사 덕에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양동교회 전도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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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원을 세울 당시, 윤치호가 전도사로 있었던 목포양동교회. 소년가장 윤치호는 미국인 선교사 덕에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이 교회의 전도사가 됐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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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가족 기념비'가 세워진 목포공생원 마당. 고아들의 생활 터전인 공생원은 목포 유달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당시 목포에는 고아들이 넘쳐났다. 걸인들도 득실댔다. 윤치호는 냇가 다리 밑에서 추위에 떨고 있던 고아 7명을 데려다 함께 생활했다. 공생원의 출발이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1928년이었다. 그의 나이 18살 때다.
 

한두 명씩 더 데려다 키운 어린이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었다. 걸인들을 돌보면서 '거지대장'으로 불리는 윤치호였지만,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치즈코를 만난 건 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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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원에 있는 윤치호·윤학자 기념관 내부. 공생원 설립자인 윤치호와 윤학자, 그리고 공생원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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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공생원의 원아들. 지금 공생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공생원을 품은 유달산도 벌거숭이 산의 모습 그대로다. ⓒ 윤치호·윤학자 기념관

 
치즈코는 1912년 일본 고치현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왔다. 1919년 3·1운동 직후다. 그녀의 나이 7살 때다. 치즈코는 야마데소학교(유달초등학교)를 거쳐 목포고등여학교(목포여중)에서 공부를 했다. 졸업 후 정명여학교 음악교사로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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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치즈코에게 목포고등여학교 은사가 제안을 한다. '공생원에서 보람있는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치즈코가 공생원에서 한국 고아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시작한 계기다.

치즈코는 일본의 만행에 속죄를 하고, 고아들에게도 웃음을 찾아주고 싶었다. 치즈코와 윤치호 원장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혼인을 했다. 치즈코의 이름도 '윤학자'로 바꿨다. 윤학자는 일본사람한테 가해지던 온갖 편견을 참아내며 남편과 함께 고아들을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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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와 윤학자의 혼인 모습. 이들의 혼인식에는 인근 지역의 걸인과 고아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 윤치호·윤학자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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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원의 원아들과 함께 한 윤학자 원장. 윤학자는 일본인이었지만, 한국에서 한국의 고아들을 돌보며 '진짜' 한국사람으로 살았다. ⓒ 윤치호·윤학자 기념관

 
해방이 되자, 윤치호와 윤학자는 친일파로 몰렸다. 공격은 윤학자에 집중됐다. 공생원 원아들이 방패막이로 나섰다. 원아들은 '일본사람이지만 윤학자는 우리들의 어머니'라며 인간띠를 만들어 보호했다. 민족은 달라도 진심은 통했다.

윤학자는 한국전쟁 때도 '고아들을 두고 도망갈 수 없다'며 공생원을 지켰다. 남녘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들이 친일부역자라고 몰아세웠다. 국군에 의해선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원아들에게 먹일 식량을 구하겠다고 집을 나선 남편 윤치호가 돌아오지 않고 행방불명된 뒤에도, 윤학자는 원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윤학자의 한국 고아 돌봄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한국전쟁 때도 계속됐다. 1968년 56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목포에서 고아들을 돌봤다. 1963년 한국정부가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일본정부도 1967년 남수포장을 주며 공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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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공생원에 있는 윤치호·윤학자 기념관 모습. 1961년에 지어진 석조건물로 원아들의 기숙사로 쓰였던 곳이다. 2012년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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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윤학자 기념관 내부. 공생원을 처음 세운 윤치호와 그의 부인 윤학자, 그리고 공생원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전시관이다. ⓒ 이돈삼

 
공생원에는 담장이 따로 없다. 아무라도 무시로 드나들 수 있다. 여기에 '윤치호·윤학자 기념관'이 있다. 1961년에 지어진 석조건물이다. 원아들의 기숙사로 쓰였던 곳이다. 지난 2012년 윤학자 탄신 100주년을 맞아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여기에서 윤치호와 윤학자, 그리고 공생원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공생원 마당에 '사랑의 가족 기념비'도 있다. 2003년 목포시민들이 성금으로 세웠다. 윤치호·윤학자 부부와 함께 어린이 7명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7명은 윤치호가 처음 데려와 돌본 고아 숫자다. 1949년 공생원 창립 20주년을 맞아 지역주민들이 세워준 기념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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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공생원 창립 20주년 기념비. 한때 친일파라며 터부시했던 지역주민들이 1949년 공생원 창립 20주년을 맞아 세워준 비석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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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공생원에 세워져 있는 ‘어머니의 탑’. 1968년 경향신문에서 윤학자를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 대상으로 선정했으나, 시상식 전에 그녀가 타계하자 나중에 공생원에 세운 헌창비다. ⓒ 이돈삼

 
1949년 세운 공생원 강당도 그대로 남아있다. 해안가에 표류해 온 난파선에서 쓸만한 목재를 골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의 탑'도 있다. 1968년 경향신문에서 윤학자를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 대상으로 선정하고 세운 헌창비다. 윤학자는 대상 수상을 앞두고 타계했다.

공생원을 품은 유달산에 봄꽃이 활짝 피었다. 벚꽃과 개나리, 목련이 한데 어우러져 환상경을 연출하고 있다. 윤치호와 윤학자의 마음꽃도 아름답다. 목포앞바다를 품은 대반동과 유달산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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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을 노랗게, 하얗게 물들인 개나리꽃과 벚꽃. 유달산 자락에 둥지를 튼 윤치호와 윤학자의 마음꽃처럼 아름답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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